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 vol.9



 "이상하지 않나요?"
 "뭐가?"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 왜 팩트와는 동떨어진 주장을 펼치는거죠? 나중에 사람들이 진실을 깨닫고 나면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모니터 화면을 주시하며 일하다가 후배의 '팩트'라는 단어에 고개를 돌려 후배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가 본 팩트는 뭔데?"
 "네? 당연히 '안좋다'는 거죠."
 "'안좋다'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본 건 아니고?"
 후배는 손까지 절래절래 흔들며 반색을 했다.
 "아니에요! 분명 여러 과학자들이나 환경 전문가들이 내세운 주장이고 그에 걸맞는 근거들이 있는걸요."
 "반대 의견은?"
 "아, 물론 반대쪽 의견도 있......죠..."
 "반대쪽 의견은 과학적인 근거가 없거나 전문가들이 아닌가?"
 "반대쪽 의견도 그에 걸맞는 근거들이 있긴한데, 그리고 전문가들이 주장하고 있고요."
 "그럼 너가 말하는 '팩트'라는 건 뭐야?"
 "하지만 분명 상식적인 거잖아요. 이게 다 정치적인 문제로 이끌어가려고.."
 후배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너가 완벽한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다면 너의 생각도 맞을 수도 있지만, 결국 너도 모르게 정치적 소견을 가지고 이 문제를 들여다보고 있을 수도 있어. 기사 제목을 만든다면 아마도 '모두가 반대했다. 그들만 빼고' 정도로 하고, 기사 내용은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고 있지만, 일부 정치적 견해를 담은 이들만이 찬성을 하고 있다라고 짤막하게 시사하겠지?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다 정치적으로 문제를 바라보지는 않아. 다만 나한테 유리한 것을 추구할 뿐이지. 그게 경제적인 것일 수도, 정치적인 것일 수도 있을 뿐인거지."​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문제는 누가봐도 아니잖아요? 경제고 정치고 다 떠나서요."

 "나도 너하고 입장은 같은데, 무조건적인 반대 입장만은 피하라고 알려주는거야. 예전에 강의 흐름을 막아서며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 때 처음에는 지역발전에 도움이 될 줄 알아서 반대하는 사람을 무시했어. 그리고 이 사업이 문제가 크다는 것을 알고 사업 자체를 욕하게 되었지.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 이 사업은 여전히 찬반이 오가고 있어. 소히 전문가라는 사람들, 그 전문가들의 말을 담는 기사들 모두 자기식으로 해석할 뿐이라는 거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사실이라는 것이 말야 알고보면 내가 보고 싶어하는 사실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거야. 그렇다고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는 것은 아니야. 다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거야."

 "제가 확증편향의 오류에 빠졌다는 말이죠?"

 "아니, 너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아, 화장실 좀 가야 겠다."

 자리는 떠나는 나에게 끝까지 후배는 물었다.

 "그러니까 제가 틀렸다는거냐구요?"

728x90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 vol.8

 

 우리는 제품을 생산하지도, 유통하지도 않는데 어떤 순간에는 물건을 파는 판매자가 된다. 물건의 사용 이력이 있든 없든 구매자가 나타난다. 물론 사용 이력이 없으면 판매 가격은 올라간다. 그리고 물건의 희소성이 높아지면 가격은 더욱 올라간다. 

 시장은 공급자와 수요자가 가격을 만든다. 가격은 공급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수요자가 해당 가격에 사지 않는다면 공급자는 시장에서 도태되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 둘의 관계에서 가격이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때론 아이러니하게도 말도 안되는 가격 같지만 시장에 형성되는 희한한 가격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공급자의 무리한 가격임에도 수요자가 그 가격을 주고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결국에는 둘의 관계에서 형성된 가격이니 이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시장에서 가격을 변동시키는 일명 '되팔이'들이 있다. 리셀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들은 시장의 가격에 악영향을 끼친다. 그들은 반문한다. 단순히 재판매하는게 뭐가 문제냐고.

 재판매의 행위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물건을 구매하고 자신과 맞지않거나 사용할 목적이 사라지면 이를 필요한 사람에게 넘기는 것은 당연히 합리적 인간이다. 그러나 되팔이들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처음 구매 시의 목적 자체가 웃돈을 받고 판매하여 차익을 남기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공연의 티켓예매는 정말 어렵다. 순식간에 모두 팔리기 때문이다. 그 공연을 보고 싶어하는 이들보다 공연장의 자리가 매번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 이 자리를 더욱 부족하게 만드는  것이 공연을 볼 생각도 없이 티켓을 재판매할 목적으로 구매한 이들이다. 이들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티켓을 본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에 판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과거의 암표상과 똑같다. 

 업체에서 한정판을 판매하면 해당 브랜드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이 구매하려고 노력한다. 선착순, 추첨 등의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구매 경쟁의 형평성을 갖기 위해 업체는 노력한다. 그러나 이 때 또다시 등장한다. 이 제품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에게 재판매할 목적으로 이 경쟁에 끼어드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되팔이라고 부른다. 

 되팔이가 왜 문제가 되는지 아직까지 이해를 못하는 되팔이들이 있다. 위에서 말한 2가지 예시만으로도 정상인은 되팔이의 문제를 인식한다. 근데 되팔이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 이정도로 인식할 정도였으면 되팔이가 되지도 않았을테니까.

 시장의 가격 형성에 불필요한 상승을 야기 시킨다. 한 두번의 리셀가는 가격 형성에 큰 영향이 되지 않을테지만 지속적인 리셀가는 본래의 가격마저 상승시킬 우려가 높다. 이는 해당 시장의 버블을 일으킨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부분 내집마련에 어려움을 느꼈을 것이고, 느끼게 될 것이다. 한 때는 주택이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택의 가격이 계속 하늘을 모르고 오르는 것이라고. 그런데 아니었다. 실거주 목적이 아닌 주택거래의 차익을 위해 구매한 이들이 너무도 많았다. 한국에는 특이하게 '전세'라는 주택임차계약이 있다. 주택을 거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임차료를 내는 것도 아니다. 계약 기간에 일정 금액을 임대인에게 맡기고 기간이 종료되면 임차인에게 해당 금액을 돌려준다. 이런 형태의 주택을 소유한 임대인은 거주할 곳을 별도로 가지고 있으면서 해당 주택을 임차인에게 임차해주면서 운영하는 것이다. 받은 돈을 그대로 돌려준다면 무슨 수익이 있을까. 해당 기간동안 전세금을 이용하여 금리적 이익을 취하든지, 혹은 다른 방식의 투자를 하여 이득을 취하기도 하지만, 바로 차후에 부동산을 취득가보다 높은 금액에 파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임대인이 손해인 것처럼 보인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임대인이 소유한 주택은 임대인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임대인은 부동산 구매에 필요한 자금을 금융사로부터 빌리고, 그 금액을 임차인이 준 임차료를 통해 갚아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임차인이 다른 임차인으로 대체가 되지 않으면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미 그 전세금을 부동산 대출금으로 써버렸기 때문이다.

 과연 되팔이들은 이들을 옹호할 것인가. 

728x90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 Vol.7

 

 짜 냄새가 났다. 

 쌓여 있는 책들을 뒤로 하고 또 볼만한 책을 찾다가 베스트셀러에서 희한한 책을 봤다. 순위권도 높았다.
 자기계발서는 언제부턴가 거부감이 들었다. 대학시절에는 자기계발서를 읽기는 했다. '나도 이 책의 저자만큼 바뀔 수 있나'라는 희망을 가져서 였을까. 하지만 나이를 조금씩 먹다보니 가리지 않고 보던 책 장르에서 자기계발서는 제외되고 있었다. 특히 시대의 흐름에 기대어 인기를 얻는 저자라면 더더욱 기피했다. 어쩌면 성공한 듯 보이는 저자에게 반감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래도 표면적인 생각은 자기계발서가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이었다. 
 주식, 부동산 등등의 수익형 책들은 항상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자기계발서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누구든 성공을 거머쥘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럴싸해보인다. 새로운 단어(혹은 문장)를 독자에게 주지시킨다. 그 단어(혹은 문장)는 '아브라카다브라'처럼 뭐든 이뤄줄 것만 같다. 새로운 용어는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이자 재산이라고 책에서 주구장창 떠든다. 
 사기다. 

 이건 엄밀히 사기이고 기만이다. 물론 그들이 누군가에게 돈을 뺏거나 한 건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시간과 돈을 들여 아무짝에도 쓸 데없는 것을 구매했을 뿐이다. 그들은 바보들에게 돈을 건네받았을 뿐이다.
 사람은 자신이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심리적으로 방어기제를 펼친다. 어쩌면 생각조자 하지 않고 바로 방어기제를 펼치기도 한다. 자신의 판단이 애초에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호수나 저수지 정도의 크기인데, 너무 가까이서 봐서 바다로 착각할 수 있다. 
 멍청한 판단이지만 자신을 멍청한 사람으로 절대로 남기고 싶지 않다. 
 인지부조화가 나타난다. 
 인지부조화로 자신의 행동을 자신 스스로 설득하고, 그러다보면 자기방어를 해야하니 확인편향적인 사고 방식을 갖게 되어 점점 더 왜곡된 사실을 받아들여 그나마 있었던 비판적인 시각이 완전히 없어진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무리와 섞이다보면 군중심리에 빠져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을 배척하게 된다. 우물 속에 갇히는 것이다. 
 여론은 초기에 어떤 시각을 가진 이들이 선점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해당 쟁점에 사람들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느냐도 중요하다. 평소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금방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여론마저 자신의 편이라 여겨지면 생각이 점점 더 고립되고 자신과 맞지 않는 이들의 생각이 아무리 현실적이고 올바르다할지라도 받아들이기 보다는 무조건 배척하고 반대의 의견을 펼치며 자기자신을 더욱 그릇된 시각으로 사로잡히게 만든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은 되돌리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마치 사이비종교에 빠져 주변의 만류에도 가산을 탕진하고 몸마저 바치는 이들을 아무리 설득해도 빼내오기가 힘들듯이 말이다. 
 더욱 웃긴 것은 사기를 치고 있는 당사자에게서 나오는 반응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그릇됨을 인지하고 그들을 속이려 거짓말을 하고 기만하며 자신을 포장해나가는데, 시간이 지나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생기고, 무언가에 사로잡혀 맹목적인 신임을 보이는 무리 속에서 추앙받다보면 어느샌가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고, 자신들을 억압하고 비판하는 이들에게 이유없이 탄압받고 있다고 생각하게되게 된다. 눈을 떠보니 자신은 사회의 모순을 부수고 있는 혁명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누가봐도 이상하다. 경력이라고 나오는 것이라봐야 결국 남들을 속여오며 벌어온 자산일 뿐이다. 마케팅은 결국 남을 속이는 거라고 하면서 말이다. 
 사회는 이런 식의 성공을 결코 포장해서도 따라해서도 안된다. 법에 저촉이 되지 않더라도 도덕에서 벗어나면 안되기 때문이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일 뿐이니까. 

 

 

 

 

 

 

 

 

 

 

 

728x90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 vol.6

  


미니스트는 여성인권주의자로 해석할 수가 없다. 과거 그것도 먼 과거에는 그 의미가 맞을 지 모르겠으나, 현재에 와서 그 의미 해석을 한다면 '여성우월주의자' 또는 '피해망상주의자' 등으로 본다면 맞을 것이다. 


 그 또는 그녀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는 없다. 논리로 이들을 접근하면 이길 수가 없다. 처음부터 논리를 바탕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판단에 A라고 생각하면 그냥 A인 것이다. 아무리 바른 소리를 한다하여도 생각을 달리하게 할 수가 없다. 이는 어떻게 보면 근시대적으로 여성으로서 받은 피해를 모두 자신들의 것인마냥 해석한다고 볼 수 있다. 현재는 그러지 않는 상황도 과거에 빗대어 지금까지 이렇게 왔으니 자신들이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들이 받아온 것도 아닌 피해상황들을 망상에 가까운 태도를 취한다. 


 이들의 모임은 매우 빈약하다. 그러나 거대하다. 그래서 섣부른 반대를 하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이 옳기 때문에 반대가 없는 줄 안다. 물론 반대 의견이 있다해도 그들에게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간혹 자신들에게 반감을 서는 인물이 있다면 때거지로 몰려와 인격모독부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 모임에 구성체들은 대단히도 빈약하다. 무리의 행동이었으나, 개개인들의 문제를 삼아 법적태도를 보이면 곧바로 사과 또는 꼬리를 내린다. 하지만 이 행동이 취해지는 과정도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겉으로는 사과의 모습을 보이지만 그들의 무리 안에서의 대화에서는 전혀 그런 태도를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이를 넘기고 다시 터무니 없는 공격을 준비하려고 한다. 


 그들이 근거와 논리를 무시한 공격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으로 그들이 여전히 약자라고 여겨지고 있으며, 법적으로 그들의 행동에 대해 취할 수 있는 방안이 없기 때문이다. 성(性)과 관련된 사항은 여성이 약자로서 인식되기에 법적으로 여성에게 유리한 측면이 있어야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악한 생각으로 남성에게 피해를 입히기 위해 사실무근의 죄를 묻는 여성에게도 그와 상당한 죄를 다시 물을 수가 있어야 한다. 법이 무섭지 않으면 그들은 법위에 사는 무리가 될 수 있다. 반사회적 행동을 계속 취하는 그들에게 법적으로 철퇴를 내릴 수 있는 방안이 시급하다.  어떠한 주제에 의해 모이는 무리를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무리들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가는 분명 따져야 한다. 일본의 우익단체를 좋은 무리라고 볼 수 없고, 미국의 인종차별자들을 용인하지 않듯 잘못된 무리는 부서져야 맞다. 그 시작이 무엇이었던지 간에 말이다.  


 권리는 주장하지만 의무는 지지 않으려 하는 자, 우리는 그런 사람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여성과 남성을 따지기 전에 우리는 모두 인간이며 동등한 존재이다. 단지 신체적인 차이가 있기에 그 역할이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신들이 그토록 증오하고 경멸하며 공격하는 대상이 결국은 자신들의 아버지, 남편, 아들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728x90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 vol.5


 리는 입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문학을 문학이 아닌 하나의 과목으로서 배웁니다. 그래서 가슴을 스며드는 시 한 편을 외우기 보다는, 기억 속에 남을 소설 한 편을 읽기보다는 시와 소설이 만들어진 시대배경과 관점, 묘사, 암시 등등 문제로서의 가치로 접근해버렸습니다. TV나 영화 속처럼 국어선생님이 창가를 바라보며 시와 소설을 읽는 건 오히려 흔한 장면이 아닌 것이죠. 문제지를 펴고 시의 전편도 아닌 어느 한 부분만 보면서 이 부분이 문제로 가장 많이 나온다고 배우고, 소설의 한 대목만 보여주면서 소설의 줄거리와 결말을 배웁니다. 박경리의 '토지'를 짤목한 지문에 나온 것으로만 배운다는 것이죠. 

 

 고등학교 시절, 언어영역의 점수를 높이기 위해 책을 읽지는 않았습니다. 그럴바엔 문제지를 하나 더 푸는게 휠씬 나을테니까요. 정규 수업이 모두 끝나고 일명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너무 흠취한 나머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물론, 담임이 나중에 발견하고, 수능점수나 올리라고 욕을 먹었죠. 하지만 지금 저의 머릿 속에 남아있는 것은 언어영역의 문제들이 아니라, '토지' 속의 한국인들이 일제 시대에 겪었던 서러움과 시대적 아픔이었고, '태백산맥' 속의 대한민국이 이념이 달라 서로 싸울 수밖에 없었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겪었을 아픔이었습니다. 

 

 문제지에서 배우는 그런 것이 아니라, 진정 문학에서 배우고 느끼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언어라는 영역에서 문학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문제를 내야 하고, 그런 문제를 내기 위해서는 공인된 관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물론, 이 점이 문학을 더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데도 용이하기도 하지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왜 옥희의 입장에서 소설을 써 내려갔는지를 알게 되면 소설이 나온 시대적 상황과 잘 맞물려가면서 더욱 작품에 대해 이해력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문학을 계산적이고 합리적으로만 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시인과 소설가가 언제나 시대를 생각하고, 문학적 용어들이 쓰이도록 작품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단지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만들어졌기에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고 보여질 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영화를 보면 평론가들이 내린 평점과 관람객들이 내린 평점이 상이하게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평론가들은 영화를 계산적이고 합리성을 가지고 보려한 반면에, 관람객들은 영화 자체를 보면서 재미를 느끼려 하기 때문입니다. 


 문학에서 의미를 찾아낸다고 그것이 유식의 증거라고 믿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슴에 남는 문학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문학을 진정 느끼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728x90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 vol.4>

 SNS(Social Network Service) 하면 떠올려지는 대명사, 트위터, 페이스북. 기타 여러 SNS 들이 있습니다만 가장 먼저 떠올려 지는 것은 앞의 두 가지 일 것입니다. 사실 SNS는 상당히 많은 서비스를 내포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지금 제가 작성하고 있는 블로그도 그 중 하나이니까요. 따라서 SNS라는 용어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다만 사람들에게 크게 와닿아지는 것이 아니었을 뿐입니다. 국내에서는 3~4다리만 거치면 모두가 일촌이라는 말까지 생겨난 '싸이월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파도가 밀어닥치죠. 바로 '스마트폰'의 출시였습니다. 스마트폰은 정말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토록 열광적이었던 싸이월드가 내리막길을 치달아 가는 것도 모바일화 되고 있는 대세를 발빠르게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뒤늦게서 따라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시장을 섭렵하고 나서였죠. 

 페이스북도 사실상 트위터보다는 하위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SNS의 대명사는 분명 트위터였죠. 마이크로블로그의 일종으로 개인사를 단 140자내외로 작성하여 팔로워들간에 소통을 한다는 것. 정말 혁신이었습니다. 뉴스보다도 빠른 소식들,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소식 등등 트위터는 스마트폰 속에서 일대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스마트폰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가 다 트위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팔로우할 대상을 찾아 나섰죠. 팔로우할 대상은 무긍무진했습니다. 유명인들의 트위터 아이디는 검색만 하면 찾을 수 있었고, 그들을 팔로우 한다는 것은 뭐랄까 친분을 쌓는다는 느낌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국내에서 트위터의 주요 팔로우 대상은 연예인이었을 겁니다. 지금이라고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유명연예인에서 내임벨류를 가진 대상으로 좀 더 확대가 되었을 뿐이니까요. 

 2년 전 트위터를 대상으로 공부를 할 때만 해도 트위터의 간편한 팔로우는 신기할 정도로 대단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상대방이 뿌리는 트윗을 원한다면 누구나 볼 수 있기에 그 파급력은 더욱 확산될 것이고, RT를 통해 정보의 힘은 더욱 증가될 것이라고 보왔죠. 

 그러다가 페이스북이 등장을 합니다. 페이스북은 트위터는 많이 달랐습니다. 상대방의 소식을 보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친구의 관계를 서로 승낙해야 되죠. 싸이월드의 일촌관계와 비슷한 개념이라서 접근하는데 어렵진 않았습니다. 따라서 페이스북도 빠른 시간동안 많은 회원수를 거느리게 되고 공유하는 정보가 더욱 커졌습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트위터는 일종의 정보를 확산시킨다면 페이스북은 정보보다는 일상을 표출한다고 보면 되는 것이지요. 여튼 서로의 장단점이 있기에 두 서비스가 모두 인기를 지속적으로 가져갈 것이라고 보왔죠.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트위터의 트윗라인은 점차 줄어들가고, 페이스북은 급속도록 증가되었습니다. 페이스북은 앞서 말한듯이 일상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지인들과의 관계 형성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그만큼 많은 뉴스피드를 생성하게 되었죠. 따라서 페이스북 이용률 증가에 따라 트위터의 이용이 줄어들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을 수 도 있습니다. 저 또한 그런 부분이 없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나 트위터는 분명 무언가 어긋나고 있습니다. 팔로우라는 제도가 계속 퍼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지점을 끝으로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물망처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얽히고 얽혀서 점점 거대화 되기는 했지만, 결국 같은 그물망 속에 멈춰버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트위터 속의 정보는 사실 상 자신이 보고자 하는 정보만 돌아다니고 있는 셈입니다. 자신들이 보고 싶어하는 내용만이 존재하다 보니 왜곡된 정보도 의심조차 하지 않고 RT를 누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RT를 누르게 되죠. 그러다보면 그 잘못된 정보가 어느새 진실이 되어 사람들의 머릿 속에 각인되어 버립니다. 사람의 머릿 속에 한 번 각인된 정보를 다시 바꾸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왜냐면 그 정보가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설득시켜야 하기 때문이죠. 단순합니다. 누군가를 미친 사람이라고 판단해버린 사람에게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많은 근거를 가져와야 되게 됩니다. 정말 진실을 거짓이 뒤덮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트위터는 이렇게 왜곡된 진실을 퍼다나르고, 자신들이 원하는 정보만을 습득하는 커다란 우물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번 총선거에서도 그 점이 더욱 부각되어왔습니다. 진보는 진보끼리, 보수는 보수끼리 자신들의 정보를 공유합니다. 그리고서는 반대편에게 독설을 가합니다. 반대편은 보지도 않는데 말이죠. 

 현재의 트위터를 이렇게 만든 것은 사용자들의 너무도 쉽게 생각하는 것 때문입니다.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고 RT를 했다면 그 책임이 분명 그들 모두에게 있을텐데, 최초 유포자에게만 그 잘못이 있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저 정정된 트윗을 날리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정말 큰 착오입니다. 속담에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어담을 수 없다 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말이란 생각을 거듭하고 하란 것이죠. 트위터의 RT는 그렇게 쉽게 눌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 정보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이 있을 때 행하여야 합니다. 물론 트윗을 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 작은 우물이라면 차라리 자신의 세상이 좁다는 것을 빨리 알아챌 수 있기 때문에 나을 지도 모릅니다. 트위터 속의 세상은 커다란 우물 속과 같습니다. 자신이 우물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노력은 바로 자신의 행동에 대한 믿음과 책임 일 것입니다. 


관련 포스팅



 


728x90
 



  스로에게 중도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생각을 여러 입장에서 하려고 노력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블로그 이름도 다차원적 생각의 발악이라고 지었던 거죠. 하지만 저도 인간인지라 제가 생각하고 싶은 방향대로 생각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발악이라도 해서 조금이라도 중도의 입장을 고수하려고 노력합니다. 

 따라서 정치적 색깔을 띄는 내용은 포스팅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제의 일련의 사건들이 결국엔 포스팅하도록 만드네요. 사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라는 제목으로 계속 써내려가는 것은 단지 그 때 당시의 제 생각을 정리한 에세이 같은 형식의 연재물입니다. 그러다 보니 때에 따라서 내용의 전반적인 흐름이 비슷하면서도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 SNS와 스마트폰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다루는데, 이번 역시 그와 관련되지만 약간은 정치 이야기를 첨부하게 되었습니다. 

 4월 11일 총선거날, 선거 결과야...참...말이 안나오는 결과였습니다. 그렇게 국민들 스스로가 외치고 불만을 가지고 있던 FTA를 통과시킨 여당이 여전히 대한민국 제1당의 힘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막아서야할 야당들은 정확한 지략도 없이 스스로를 와해시키고 변절시키고 결국엔 겨우 국민들의 깨우친 분들 덕분에 서울에서나마 변화의 조짐을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큰 변화를 염원했던 국민들은 국민들 스스로가 현실에 안주하게 만드는 결과를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투표율 50%대...국민 중 2명 중 1명만이 투표에 참여. 자신의 권리마저 저버린 시민의식. 진보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참혹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일은 선거가 끝나고 다음이었습니다. SNS를 통해 퍼져나간 20대투표율에 대한 비난, 지역에서의 일방적인 선거결과에 대한 비난 등은 가히 팀킬이라 부를만 했습니다. (여전히 트위터 상에는 근거도 없는 이야기가 진실이 되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제발 RT를 하기 전에 이 트위이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부터 판단하세요. 무작정 퍼다날린 당신의 선택이 망국의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 세대별 투표율이 정확히 나오지도 않은 판국에 누군가가 지레짐작하여 퍼다 날린 정보를 믿고 20대를 싸잡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 등록금은 천만원을 넘겨봐야 20대가 정신을 차린다.

 - 무한도전이 종방되야 방구석에서 일어나서 투표하러 나간다.

 - 시위는 할 생각도 하지 말아라. 등등

 진보성향의 사람들은 선거결과의 불만을 토로할 대상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마침 그들의 표적이 될만한 상대를 찾게 되었고 주 대상으로 20대를 골랐던 것이죠. 네, 저도 20대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선, 총선거, 지방선거 등등 투표를 빠진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20대 대부분은 투표권을 행사합니다. 하지만 일부 몰지각한 20대들은 투표를 안하는 것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부류가 있기도 하죠. 그러나 일부입니다. 투표를 못한 사람 중에는 어쩔 수 없이 못하게 된 사람도 꾀나 많습니다. 휴일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모두가 쉬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묻고 싶습니다. 

 지난 세월동안 20대의 투표율이 높았던 적이 있나요?

 당신들은 20대를 거치지 않고 바로 30대나, 40대의 나이를 드신건가요?

 그렇습니다. 당신들도 예전에는 분명 20대였고, 투표율이 낮은 세대를 지나왔습니다. 20대가 투표율이 낮은 이유는 위에서 말한 것 말고도 많습니다. 

 10대 시절, 정치에 관심을 가지도록 기성세대가 이끌어주었나요? 정치에 관심 갖게 만들기 보다는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하도록 하게 만든 것이 이 사회가 아니었습니까. 그런 상태의 10대 시절을 보낸 이들이 20대가 되었다고 갑자기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올바른 투표권을 행사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0대 시절부터 올바른 이끌림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의 선거구에 나온 사람들 중에 누가 올바른 사람인지 알 수가 없기에 그 중 누군가를 뽑긴 해야 되지만 자신이 잘못 선택해서 투표를 행사하면 오히려 해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네, 물론 어떤 논리를 갖다 붙여도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는 사람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비난을 하기 전에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비난은 정말 답이 없습니다. 왜냐면 대화가 되질 않거든요. 애초에 이유가 없으니까요. 

 아직 정확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도 20대의 투표율은 낮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투표율이 낮다고 해서 무작정 비난하고 욕할 것이 아니라 이들 세대가 왜 낮을 것인지를 생각하고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올바른 생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울러, 지역적으로 상식적으로 뽑힐 이유가 없는 후보가 당선되는 것은 지역민들이 후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을 먼저 보기 때문입니다. 후보라고 나오는 사람을 지역민들이 언제나 알고 있을 턱이 없으니까요. 아직은 대한민국의 선거는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닙니다. 조금씩 높여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서로에게 비난하고 욕하지 마세요. 이끌어 주세요. 보다 올바른 길로 말이죠. 



 
728x90

 

 

 


 

 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과거에 대한 회상은 이상하리만치 인간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기억을 '추억'이라 부르며 아름다운 것으로 여깁니다. 그 시절에는 무척이나 힘들었을텐데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픈 기억마저 추억이 되어 과거를 미화시킵니다. 

 핸드폰의 보급화는 우리들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습니다. 개인이 어디서나 언제든지 연락이 필요하면 주고 받을 수 있게 되었죠. 이 때문일까 우리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너무도 쉬워졌습니다. 과거 친구와의 연락을 취할려면 친구의 집전화로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걸기 전에는 머릿 속에 되뇌었던 문장도 있있죠.

'안녕하세요, 저는 xx친구 yy라고 합니다. xx와 지금 통화할 수 있을까요?'

라고 말이죠. 하지만 친구녀석이 집에 없다면 연락할 방법은 직접 찾아나서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삐삐는 제 세대에서는 크게 활용되지를 못했습니다.) 물론, 더욱 과거로 돌아간다면 집전화조차 없던 시절이 있었고 그랬겠지만....그렇게 먼 과거까지 들먹이지는 않겠습니다. 어쨋든, 우리에겐 휴대폰이 생기면서 만남이 쉬워졌고, 연락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히지만 휴대폰(피처폰)은 주 수단이 통화와 문자메세지였습니다. 따라서 휴대폰이 차지하는 시간적 비율이 하루에 많지는 않았습니다. 무언가가 울려야 보게 되니까요. 네, 휴대폰도 시대가 점차 변화하면서 기능이 다양해지기는 했습니다. 처음에는 간단한 게임이 추가되더니, 어느새 mp3플레이어를 내장했고, 카메라기능이 생기며, 디지털기기의 종합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조금씩 휴대폰은 우리의 삶을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 특별한 내용도 없는 통화와 문자가 서로에게 전달되고, 이로 휴대폰을 손에서 놓질 못하는 사람도 생겨나곤 했습니다. 

 그러나 큰 문제는 스마트폰의 출현이었습니다. 스마트폰은 지금까지의 휴대폰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할 수 있는게 무궁무진했죠. 커다란 노트북을 통해서 할 수 있었던 것들이 손 안의 작은 스마트폰에서 되다보니 사람들은 그 속에 빠져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너무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생겼습니다. 카페에서 만난 사람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이야기를 하는 시간보다 개별적으로 스마트폰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말이죠. 그들은 분명 서로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만났고, 만난 시간은 한정적이기 때문에 서로간의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을 보내야 할텐데, 그들은 이상하게도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상대방보다 스마트폰을 통해 타인과 이야기를 하거나 앱을 사용해서 시간을 보내버립니다. 

'우리는 무엇이 그리도 바쁜 것일까요?'

 자신의 앞에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못나눌정도로 바쁜 업무를 스마트폰을 통해서 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 뿐만 아니라 제 3의 인물들과도 나눌 이야기가 많은 건가요.

 누구에게나 시간은 소중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할애하며 만남을 가진 상대방 또한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그토록 중요한 시간 속에서 중요한 사람과 만남을 가지는 동안은 잠시간 스마트폰을 가방 속이나 주머니 속에 넣어두는 것을 어떨까요. 누군가에게 연락을 올지도 모릅니다. 그 때는 확인하세요. 긴 시간은 아닐테니까요. 다만 메신저앱을 통해서 전달되는 이야기가 당신의 얼굴을 보고 있는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보다 중요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 하세요. 당신과 마주하고 있는 지금의 상대방과 함께.

관련포스팅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 vol.1

 

 

 

728x90

 

 


 최

근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지하철4호녀. 비단 이번만의 사건이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터진 채선당 사건. 그리고 과거의 xx녀, xx남 등으로 불리며 누리꾼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물론 이같은 사건들이 과거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사는 사회이기에 일반인의 시간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이들은 언제나 사회 속에 존재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 더욱 이같은 일들이 이슈화 되는 것은 왜 일까? 그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통신기기의 발달과 인터넷의 보급이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과거 인터넷은 극히 소수만이 쓰는 온라인상의 가상공간으로만 이해되었다. 그러나, 각 가정마다 개인PC가 생기고 인터넷이 보급됨에 따라 사람들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규합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를 더욱 가속한 시킨 것은 통신기기이다. 통신기기는 개인들간의 통화를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최근 스마트폰 등은 무선인터넷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원할 때 인터넷을 할 수 있게되었다. 이에 따라 더 이상 사회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존하는 사회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자,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공존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바로 공간의 제약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소식이 전달되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그 소식이 전해지는 과정이 길었고, 내용의 정확성도 많이 떨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현장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어딘가에서 사건이 터지고 이에 대한 온라인 업로드가 이루어진다면 누구와도 공유가 가능하다. 

 1. 서두에서 말한 사건 등이 터진다. 
 2. 누군가가 그 모습을 SNS에 찍거나 올린다. 
 3. SNS의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가 이뤄진다. 
 4. 온라인기자들에 의해 기사화 된다.
 5. 전국의 사람들이 알게 된다.

 이 과정이 걸리는 시간은 빠르면 채 1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사건에 대해 한 목소리로 비판을 쏟아낸다. 사건의 전파에 있어서 신속성은 확보가 되었다. 그러나 정확성은 확보되지 못했다. 그렇다고해서 위의 대상들을 두둔하고 싶진 않다. 다만 이러한 사건들이 언제나 옳은 결과만을 낳았던 것은 아니다. 일명 '마녀사냥'이라 불리며 아무런 잘못도 없던 일반인이 되려 피해를 보고 사회 속에서 매장되어버린 것이다. 옳지 못한 행동을 한 대상들에게 비판을 가하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다. 그러나 정확한 판단이 결여된 비판은 오히려 사회악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넓은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선동되기 쉽다.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가 한쪽으로 치우친다면 그 무리 속에 껴있는 사람은 당연스레 그 무리의 의견과 동일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 어떤 사건이든 하나의 단편만을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사건 속의 시작점은 무엇이었고, 과정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비판하기 전에 알아야 필요성이 있다. 특히 사건 속에 있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자신이 직접 목격한 듯이 외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그런 이들이 바로 선동을 이끄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현재 수많은 정보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특히 SNS의 발전은 놀라울 정도로 빨라지고 있다. 우리는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행동에 제약을 줘야 한다. X의원의 어처구니 없는 주장에 모두가 의심을 가지게 되었지 않는가, 우리가 얼마나 거짓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728x90

+ Recent posts